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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큰비가 쏟아지고 난 뒤, 거미들이 부지런히 집을 짓습니다.

거미줄 사이로 맺힌 물방울이 흐린 세상을 비추며 맑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 영혼들이 있습니다. 김수영, 조지 오웰, 권정생, 그리고 지그문트 바우만.

시대의 진실을, 보려면 볼 수도 있는 그러나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그 어둠을 직시했던 사람들.

이들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어둠에 펜을 담구고 온몸으로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렇게 써 내려간 미미한 어둠의 빛줄기가 세상이 끝나버릴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거미」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바라는 것이 있는데 으스러지게 서럽고, 몸이 타들어가듯 답답한 이유는

그 바라는 것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 시인은 무엇을 바라며 설움에 몸을 태웠던 걸까요? 

그것은 아마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숭고한 삶의 가치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고 하는 김수영 시인의 한탄은 이상에 대한 체념과 포기였을까요?

아니면 더는 서러워하지 않고 바라는 것을 쟁취하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고백이었을까요.

저는 후자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대부분이 바라는 것, 또는 바라도록 강요당하거나 길들어져 것은

바로 돈과 물질적 풍요, 안락함 같은 자본주의적 가치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길 강요받지만 성공할 수 있는 사람과 돈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성공이란 남을 밟고 올라서는 성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바라는 것이 있지만 결코 그것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의 설움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리 대부분에게서 김수영 시인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되풀이됩니다.

끊임없이 자본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는 세계 속에서 희망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거나 혹은,

더 이상 무언가를 바랄 힘이 없어지거나 아무것도 바랄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영혼은 몸이 까맣게 타버린 거미의 주검처럼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처에서 이미 까맣게 타 죽어버린 영혼들의 얼굴을 목격합니다.

어린 나이부터 내몰리는 자본주의적 경쟁의 전쟁터에서

지치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헛된 희망과 필연적인 절망을 반복하며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욕망과는 다른 욕망도 존재합니다.

보이지 않는 시대의 진실을, 애써 추구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삶의 진리를 바라고 욕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재 정권에서 자유를 외쳤던 김수영 시인이 그랬고

제국주의 시대의 대영제국에서 버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글을 쓴 조지 오웰이 그러했으며

휘황찬란한 자본의 불빛이 온 도시를 비추는 오늘날 그 빛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 대해 말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님이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앞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애써 찾지 않아도

이미 자신이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여느 훌륭한 작가들이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과 달리,

권정생 선생님은 그러한 삶을 살도록 강요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쓴 책의 인세로 10억이 넘는 돈을 벌고도 그 생활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는 남의 불행을 담보로 획득한 행복과 풍요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게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작고 힘없는 것을 보살피고 그것들의 존엄을 지켜주는 사랑이 실천되는 세상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가난한 삶의 방식을 지켜낸 것은 끊임없이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 필요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이 세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가난한 존엄을 지켜내려고 한 그의 투쟁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헛된 희망에 종속되고 있고 그것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권정생 선생님도 자주 서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서러움이 가슴에 맺혀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그가 살아낸 삶의 방식은 언젠간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선생님은 우리가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전지구적 ‘공백의 시대 Times of Interregnum’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정치란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이고 권력은 무엇인가가 행해지도록 하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바우만 선생님은 이 정치와 권력이 다시 만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인류가 마주한 최대의 과제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정치와 권력이 분리되었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통제하고 질서지우는 힘이

종전의 국민 국가에서 전세계적 시장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공동체, 좋은 국가를 만들려고 해도

이미 국가는 그러한 방향으로의 변화와 개혁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힘을 가지고 있는 시장은 결코 사람들이 다 같이 존엄하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정치적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시장은 다만 끝없는 이익과 성장만을 기계적으로 추구하는 얼굴 없는 전세계적 시스템일 뿐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시장이 독점한 권력을 다시 우리, 존엄한 보통사람들에게로 가져와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만들 힘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바라는 세계에 대한 공동의 합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지그문트 바우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무엇이 행해져야 할지 결정하는 능력’을

우리 삶의 차원에서 발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어떤 세계에 살고 있으며, 어떤 세계에 살고 싶은지 묻는 것은

그렇기에 정치적 물음이며,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우리는 공식적이고 지배적인 매체가 선전하는 세계의 거짓되고 왜곡된 모습에 맞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또는 보이지 않는 곳의 진실을 드러낸 작가들의 책을 통해 느끼고 알게 된

우리 지구시민이 처해 있는 상황의 진실에 대해 재정의하고, 이를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용어로 어떤 상황을 정의하고,

공동으로 행위 할 능력을 발전시키며, 테러와 헤게모니적 권력에 대한 민주적 대안을 구성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동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낼 때,

그들의 탁월함을 발휘할 때, 그리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때, 사람들은 권력을 창출한다.

 

-제프리 골드파브, 『작은 것들의 정치』 중에서


 

그렇다면 여러분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살고 싶은 세계, 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여기에서 이 물음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결국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세청세, 한결님 작성. 2012년 7월 22일자, http://cafe.naver.com/jscs/1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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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endoZinZ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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